3P바인더를 사용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자료를 언제든지 넣고 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게 자료를 넣기 위해서는 20공이 뚫려 있는 용지를 사거나 펀치를 구입해야한다는 리스크가 있었지만 몇몇 장점이 그 리스크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군 생활을 하면서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여기서 남는 게 하나도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었다. 기록을 제대로 시작했던 것이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보급품으로 나오는 수양록부터 집에서 보내준 작은 수첩, 그리고 따로 구매한 프랭클린 플래너까지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도, 식사를 하고 나서도, 근무를 다녀와서도 늘 짬짬이 시간을 내어 기록을 했었다.
(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까지의 기록)
군대라는 곳이 내 생각에만 집중하다보면 제식 중에 혼자 걸음이 틀리거나 군가를 부르다가도 혼자 가사가 틀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만큼 내 생각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시기였다. 무조건 교관(또는 조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단체로 움직일 때는 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생각을 한다는 것을 따로 시간을 내어 얻어내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이 밥 주면 밥 먹고, 훈련이 있으면 훈련 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잠깐이나마 일기를 쓴다거나 메모를 하는 행위를 하다보면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접이식 책상을 펼치고 모나미 펜과 수첩을 꺼내 놓고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다 보면 여전히 그때만큼 쓰는 것에 엄청나게 몰입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전역을 하고 나서도 생각, 사색, 기록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수집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이 하나 둘씩 쌓이게 되니 이제 규격화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어떤 자료는 A4 사이즈, 또 다른 자료는 A5, B5 등등등. 각기 다른 사이즈가 모이니 어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3P바인더를 만난 것이다. 이전까지는 가장 흔한 A4 사이즈에 맞춰서 자료를 보관했지만 3P바인더를 알고 나서는 거의 모든 자료를 A5로 규격화시켰다. 출력하는 자료는 인쇄를 A5로 하고, 기존에 있던 자료들은 축소 복사를 통해 A5 자료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렇게 탈바꿈된 자료들은 하나둘씩 서브바인더로 만들어졌다.
서브바인더 변천사
2015년 2월.
취업준비생으로 주로 공부를 했던 시기였다. 취준생답게 토익/인적성/한국사 공부를 하느라 공부 자료들을 서브바인더로 따로 제작해서 도서관에 들고 다녔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 전까지는 늘 A4로 뽑고 공부하다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자료들이 훼손되거나 분실되어서 다시 출력해야하거나 있는지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A5 바인더에 넣고 다니다보니 그런 염려가 많이 줄었다. 그 외에도 꾸준히 기록했던 월간/주간계획들이 일정량 차면 일정 노트로 옮겼고, 책을 읽고 나서 썼던 감상평을 독서노트로 옮기면서 그렇게 서브바인더가 하나둘씩 쌓여져갔다.
2015년 6월
4개월이 지나고 나서는 서브바인더 3권이 더 추가됐다. 돈을 벌지 않은 취업준비생이었음에도 가계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재정노트와 영수증 노트를 사용해서 재정파악을 했었고, 여태까지 여행 또는 놀러 다녔던 티켓이나 사진 자료 등을 여행 노트에 보관하기 위해 서브바인더를 늘렸다. 역시나 이때 당시에도 해당 서브바인더는 굉장히 잘 썼다.
2016년 2월.
(바인더를 처음 쓰는 사람은 이런 서브바인더가 감탄의 대상이지만, 오랜 기간 쓴 사람에게는 골칫거리다.)
2015년 6월이랑 차이가 있다면 취업 준비생에서 직장인이 된 것. 그래서 토익/한국사/인적성 노트가 삭제 예정으로 이동했다. 다 공부했던 흔적이라 버리기 굉장히 아까워서 몇 달을 고민했었는데 결론은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만들자였다. (7개월이 지난 지금, 한 번도 필요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일정노트를 굉장히 세분화시켰고, 중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여행 노트를 하나 추가시켰다. 아마 이때가 가장 많은 서브바인더를 보유하고 있었던 적이 아닐까.
2016년 6월
그 전부터 에버노트를 사용하긴 했었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진 않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아날로그로 작성하는 업무일지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짙어졌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에버노트가 내가 사용하는 서브바인더의 판도를 흔들었다.
디지털화 할 수 있는 건 에버노트에 올리고 , 자주 보지 않는 건 없애자!
그래도 굉장히 많은 서브바인더들이 남았었다. 그 중에서도 절대 버릴 수 없는 추억 노트들, 모임 노트들이 서브바인더가 보관된 책장 한 켠의 절반을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디지털에 눈을 뜨면 눈을 뜰수록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
'1~2년에 한 두번 볼까말까한 편지를 굳이 실물로 가지고 있어야 하나?'
'영수증은 가계부에 입력하면 더 이상 필요 없지 않나?'
'그래도 필요한 자료들은 사진이나 스캔 찍어서 따로 보관하면 될 거 같은데.'
처음 이 생각이 들었을 땐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상충되면서 어떤 방법을 택해야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서브바인더로 가지고 있는게 낫지 않나?', '지금보다 안 늘리면 되는거 아닌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건 <부자가 되는 정리의 힘>의 저자인 윤선현씨가 운영하는 정리력 카페를 알고나서부터다. 마침 내가 알던 시기에 정리력 페스티벌 5기를 모집하고 있어서 덜컥 신청했는데 100가지 정리 주제로 100일동안 실천하는 프로젝트였다. 정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뭐 어렵지 않겠네'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이 막상 시작해보니 정리하는게 어려운 게 아니라 꾸준히 한다는 게 참 어려웠다. 어쨌든 그렇게 정리력을 100일동안 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정리'라는 단어의 정의가 바뀌었다.
<있던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는 것, 물건이 많아도 깔끔하게 보이는 것> → <필요없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거나 남들에게 나눠주는 것>
서브바인더는 필요 없는 물건들은 아니었지만 굳이 보관해야할 필요는 없는 없는 물건들이었다. 얼마든지 디지털로 대체되니깐?
<원드라이브에 옮겨진 다양한 자료들>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사진부터 3P바인더 자료, 금융 정보, 영수증, 여행 자료, 군대 자료, 명함 등 다양한 자료들이 현재 원드라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아날로그로 보관을 해야한다면 책장이 필요하고, 서브바인더가 필요하고, 각종 자료들을 편집하고 출력하기 위해 바인더용품, 문구용품, 프린터까지 필요하다. 그렇게 서브바인더를 한 두권씩 만들어내다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수많은 바인더, 문구용품이 집에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인더를 사용하면서 꼭 필요한 바인더/문구용품은 사는 것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게 쉽지가 않다. 다이소 또는 핫트랙스에 잠깐 뭐 사러 갔다오는 길에도 바인더 생각에 문구용품쪽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되고 '풀을 다 쓴 거 같은데', '양면테이프가 필요할 것 같은데' , '이 스티커를 바인더에 붙이면 예쁘겠다!' 라는 생각에 계획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구입하고 서랍에 보관한다. 물론 구입 초반에는 자주 활용하고 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 여분이 남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 가다가 나중에 서랍 정리를 할때 쯤이면 '아 이거 필요하긴 한데..' 라는 생각에 막상 버리진 못한다.
위 얘기는 내가 직접 겪었던 얘기다. 서랍을 열어보면 정말 다양한 문구용품들이 쌓여있다. 오죽하면 누나가 집에 잠깐 왔을 때 너 문구점 하냐고.ㅋㅋㅋㅋ
우리는 물건을 버릴지 말지 고민할 때 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아직 사용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물건을 버릴 땐 과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가 이 물건을 과연 계속 사용해왔던 건가? 계속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깝더라도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게 맞다. 만약 다시 필요하게 되면? 딱 쓸만큼만 조금 사거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빌리면 된다.
서브바인더 4권이나 차지했던 편지들은 이제 모두 디지털로 변환시켰고 실물 편지지는 조만간 모두 버릴 예정이다.
그리고 원노트에도 3P바인더 전자필기장을 하나 만들어서, 자료를 보관할 섹션들을 만들어두었다.
Plan 섹션은 사명 및 비전, 평생계획, 연간계획, 한 해 되돌아보기, 월간 계획, 월간 계획 피드백 등.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게 모두 스캔을 떠서 보관하고 있다.
주간계획은 월 단위로 보관을 하고, 1년마다 구분을 두었다.
Knowledge 섹션은 책, 영화, 여행 등 다양한 문화활동에 대한 산출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북 리스트는 이렇게 엑셀파일로 만들어 원노트에 보관하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인쇄해서 바인더에 출력할 수도 있다. (물론 출력할 일은 많이 없을 거지만?)
영화 리스트도 이렇게 한 눈에 보기 쉽게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
여행 노트는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예정이다. 링크를 통해서 하위 페이지로 들어가면 그 여행에 대한 정보가 모두 보이게 만들 예정이다.
이렇게 아날로그 자료들을 디지털 자료를 바꾸면서 편지처럼 아날로그 자료들이 모두 버려지는 건 아니다. 독서노트나 주간계획 표 등은 아날로그/디지털 자료로 병행할 예정이다. 그럼 왜 중복으로 두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디지털 자료로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생각날 때 볼 수 있고,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요즘 에버노트나 원노트와 같은 디지털 도구들은 이미지에 적혀있는 글씨도 검색이 가능하다. 즉 OCR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
내가 주간계획에 손수 썼던 내용이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과거에 어딜 다녀왔던 거 같은데 그 시기가 기억나지 않을 때 원래대로라면 주간계획표가 담긴 서브바인더를 다 꺼내서 하나하나 살펴봐야하는데 이제는 그런 수고로움을 피하고, 그냥 검색하면 바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서브 바인더 '수집'을 중단하는 것이지, 서브 바인더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행 노트처럼 언제든지 필요성이 있으면 서브바인더는 계속해서 늘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수집을 위한 서브바인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지난 달 말쯤 바인더(+디지로그) 코칭을 했을 때 코칭을 신청하신 분께서 바인더를 오랜 기간 사용하다보니 서브바인더를 어떻게 분류할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런 고민을 한 번 겪어봤기에 내가 왜 서브바인더를 줄였는지에 대한 자료를 하나 만들어서 보여드렸더니 하나하나 너무 공감이 된다며 사진을 찍어가셨다.
수집에 대한 의구심.
앞으로의 활용도.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것.
공간의 제한. 미니멀 라이프.
검색의 제한.
만약 현재 서브바인더의 활용이나 계속 만들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이라면 위 5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적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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