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록을 통해 살아내다.
무더운 햇볕이 내리쬐는 2009년 7월 13일, 논산에 위치한 육군 훈련소로 입대했다. 입소대대에서 3박 4일간의 일정을 보내고 훈련소에서 5주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기록하는 것은 대학교를 다닐 때부터 좋아했고, 즐겨했지만 그때는 나를 위한 기록은 아니었다. 성적을 조금 더 잘 받기 위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해 주로 정보성 위주의 기록이었다. 기록을 하는 목적은 달랐지만 그렇게 이어온 습관이 현재까지 기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를 돌아보는 기록도 그때는 참 어색했다.
입소대대에서 보급품으로 받은 수양록을 시작으로 집에서 보내준 작은 수첩, 그리고 메모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따로 구입한 프랭클린 플래너까지 1년 10개월간 군생활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군대라는 곳이 내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면 제식 훈련 중에 혼자만 걸음이 틀리거나 다 같이 군가를 부르다가도 나 혼자만 가사가 틀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내 생각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시기였다. 늘 조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단체로 움직일 때는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생각한다는 것'을 따로 시간을 내어 얻어내지 않으면 그들이 시키는 것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상실의 시대에 느낀 공허함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개인 정비를 마친 후 잠깐이나마 허락되는 휴식 시간에 일기를 쓴다거나 메모하는 행위를 하다 보면 다행히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접이식 책상을 펼치고 모나미 펜과 수첩을 꺼내 놓고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다 보면 28년을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쓰는 것에 몰입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일기를 쓴 5주간의 훈련소 생활
쓰는 행위를 통해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고, 그 공간에서 상실된 주도권도 잠깐이나마 다시 쥘 수 있었다. 그 행위 덕분에 평소에는 보잘 것 없었던 것(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모든 것들)이 좋은 글감이 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그 느낌은 잊히지 않고 있다.
전역을 하고 나서도 생각, 사색, 기록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수집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이 하나둘씩 쌓이게 되니 규격화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기록을 할 때는 어떤 재질이든, 어떤 사이즈든 일단 쓸 수만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기록된 내용을 보관해야하거나 다시 찾기 위해서는 정리가 필요하다. 프린터로 출력한 자료는 늘 A4 사이즈였고, 시중에서 구입한 플래너는 표준 규격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사이즈가 다르다보니 어떤 자료들은 책장에 꽂아두기도 하고, 그 책장에 들어가지 않아 가로로 넣기도 하고, 작은 사이즈는 서랍에 넣곤 했다.
2. 우연히 만난 3P바인더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 들어야하는 전공과목과 듣고 싶은 교양을 채우고 졸업까지 몇 학점을 들어야하는지 계산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학기에 널널하게 다니기 위해서는 성적에 영향이 없는 1과목 정도 더 추가해야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Pass/Fail로 학점을 부여하는 일반 과목에서 '셀프 리더십'이라는 강의를 수강했다. 그때 그 과목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사용하고 있는 플래너인 A5 사이즈의 3P바인더를 만났다. 그 강의는 거의 30명이 넘게 수강했지만 다들 1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온 경우가 많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강한 경우는 드물었다. 다행히 기록을 전부터 좋아했던 나는 바인더를 활용한 셀프 리더십 강의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16주간 걸쳐 바인더, 기록에 관한, A5 규격에 대한 정말 많은 내용들을 배웠다. 그저 듣고 흘리기엔 아쉬워서 그동안 기록했던 자료들이나 앞으로 발생할 자료들을 모두 배웠던 내용을 토대로 적용시켜 활용하니 해당 과목 강사 분도 나를 여러 번 극찬하셨다. 그리고 강의 마지막 시간에는 이제까지 작성한 바인더를 평가 받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메인 바인더 최우수상을 받아서 가죽 바인더를 하나 포상으로 받아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사용했다.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자료를 가장 흔한 A4 사이즈에 맞춰서 보관했지만 3P바인더를 알고 나서는 대부분 A5 사이즈로 규격화시켰다.
군대에서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사용했고, 문구점에서 파는 일반적인 플래너, 책을 살 때 사은품으로 주는 굿즈 다이어리까지 정말 많이 써봤다. 바인더를 접하기 전까지는 기록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어떤 제품이든 상관 없다보니 다양한 제품을 썼지만 3P바인더를 통해 규격화의 장점을 맛 본 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3P바인더를 사용한지도 햇수로 6년이 넘었다.
3. 왜 3P바인더를 택했을까?
프랭클린 플래너 같은 시중의 대부분 플래너는 A5, B6 같은 표준 사이즈가 아니었다. 속지를 다 쓰면 시중에 파는 비싼 속지를 구입해야 하기도 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양식이더라도 이 플래너를 쓰는 한 그 양식에 맞춰 써야했다. (직접 속지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과정이 번거롭다.) 그리고 해가 지나면 아직 여분의 속지가 많이 남았더라도 날짜가 인쇄 돼 버린 철지난 다이어리를 버리고 새로운 해의 날짜가 찍힌 다이어리를 구입해야 했다.
A4에서 반으로 자르면 읽기 가장 편안한 A5 사이즈가 된다.
가장 많은 바인더를 보유했을 때의 메인 바인더와 서브 바인더
고정섹션, 출처 : 3P바인더 홈페이지
1~2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있는 서브바인더와 달리 메인 바인더는 최소 8개 정도의 주제에 대한 자료가 포함된다. 위에서 말한 주간계획표는 2단인 Weekly 섹션에 포함되는데 속지 4장이 총 1달이 된다. 12달을 넣으려면 무려 48장이 메인 바인더에 들어가는 셈이다. 다른 섹션의 자료를 적절히 넣기 위해서는 섹션 간의 적절한 안배가 필요하다.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자료를 넣다가는 바인더가 벽돌처럼 무거워진다.
주간계획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메인바인더에서 서브바인더로 옮겨지는 식이고, 군대 생활을 기록한 '이등병의 편지' 같은 바인더는 처음부터 서브바인더로 만들어진 자료들이다. 군대에서 기록한 일기, 주고받은 편지 등을 보관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소개해보기로 한다.
4. 하루 동안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자 그러면 이제 하루 동안 내가 어떻게 기록하면서 생활하는지 살펴보자.
1. 아침에 일어나서 바인더가 담긴 가방을 챙겨서 출근한다.
2. 회사에 도착하면 30분 남짓 책을 읽는다.
3. 업무 시작 시간 10분 전에 책을 덮고, 컴퓨터를 킨다.
4. 그때 동시에 바인더의 주간계획을 펼친다.
5. 1-4번의 항목을 시간표(Time Table)에 기록한다, 적어뒀던 오늘 해야 할 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새로운 할 일이 생겼으면 아래에 추가적으로 적어놓는다. (업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바인더보다 원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6. 오전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업무 시작되면 다시 한 번 바인더를 확인하고 오전 업무 및 점심시간에 했던 것들을 기록한다.
7. 오후 업무를 보고, 퇴근하기 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의 경과를 확인한다.(완료, 연기, 취소 등의 플래그를 표시)
8. 잠들기 전 다시 한 번 바인더를 펼쳐서 놓친 부분이나 내일(+또는 이번 주에) 해야 할 것들을 적어놓는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침(오전 업무 시작), 점심(오후 업무 시작), 저녁(퇴근 전), 저녁 (잠들기 전)까지 최소 4번의 바인더를 펼쳐 기록을 한다. 회의를 하거나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등 비정기적인 일들이 발생하면 그 횟수는 더 늘어난다. 보통 한 번 기록을 할 때 약 10분 정도 소요되고, 업무 시간에는 언제든지 메모를 할 수 있게 바인더를 펼쳐놓기도 한다.
5. 일상의 어떤 종류를 기록으로 남기는가?
회사에서는 업무 시간 대부분 '원노트'를 통해 업무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예전에는 바인더에 업무일지를 기록했었지만 원하는 자료를 바로 찾기가 번거롭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브바인더로 옮기기 때문에 항상 들고 다니지 않아 참고하기가 어려웠다. 간혹 회의를 하거나 급하게 적어야할 땐 바인더에 기록을 하고 있지만 여유가 생길 때마다 내용을 정리하여 다시 원노트에 옮겨 적고 있다.
바인더는 대부분 개인이나 모임을 위해서 활용되고 있다. 해야 할 일이나 했던 일들을 주간 계획이나 월간 계획표에 기록하고, 퇴근 후나 주말에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땐 바인더를 펼쳐놓고 독서노트도 함께 기록한다. 그리고 블로그나 브런치에 포스팅할 좋은 글감이나 주제가 떠오르면 별도로 만든 '포스팅 속지'에 기록하고 나중에 포스팅할 때 참고하기도 한다.
또한 극장에서 본 영화나 읽었던 책에 대한 리스트를 기록하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다른 사람의 추천 등으로 소개 받은 책들을 '읽고 싶은 북 리스트'에 기록해놓고 나중에 책을 살 때 참고하기도 한다.
6. 내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
기록을 하기 전에는 한 해를 알차게 보냈더라도 늘 연말이 되면 늘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올해는 뭘 했기에 벌써 1년이 지났나 싶기도 하고, 계획했던 신년 목표들은 기억이 않기도 한다.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다시 내년 계획에 그 신년 목표를 고스란히 적어둔다. 그렇게 늘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이 따분했다. 좀 더 주도적으로 살아낼 수 없을까. 내가 소설가라면 내 일상이 소설이 되기도 하고, 영화감독이라면 영화가 되기도 할 텐데 현실은 회사원이라서 일상이 따분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수차례 좌절하기도 했지만 굳이 직업이 소설가, 영화감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내 일상이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강점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기록을 통해 발견할 의무가 있었다. 기록을 한 이후에는 연말에 날을 잡아 모임 사람들 혹은 혼자 그동안 적어둔 월간계획, 주간계획을 들고 조용한 카페나 한적한 장소에 가서 한 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1월부터 12월까지 무엇을 했고, 어디를 다녀왔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 해를 되돌아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올해 참 많은 일을 해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그리고 소홀했던 부분은 내년 계획에 배치하면서 올해보다는 알찬 한 해를 살아내자고 다짐한다. 똑같은 삶이더라도 내가 주기적으로 신경 쓰면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그냥 사는 대로 흘러가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보다는 한 뼘 더 성장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 오늘도 나는 기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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