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2년간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권모씨(25)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모씨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지인의 추천으로 2012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 인재교육본부 인턴(업무보조) 사원 1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이후 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사측은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고 2년동안 7차례나 재계약을 맺었다.
권씨는 지난 2월 퇴사를 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인사담당자는 조금만 더 근무하면 곧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준다는 '희망고문'에 가까운 사탕발림으로 정직원만큼이나 일을 곧잘하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근로계약 외에도 업무 특성상 잦은 술자리에서 아버지뻘쯤의 중소기업 사장들의 음담패설 및 성추행 등도 그녀가 고스란히 버텨내야하는 몫이었다. 그래도 정규직만 되면 모든 게 해방이라는 기대감에 그녀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맡았던 중소기업 CEO 교육과정, 계약직이 맡기엔 다소 과도한 업무라 보여진다. ⓒ 중소기업중앙회 홈페이지
첫 계약은 1년이었다. 그 이후 사측은 정규직 전환을 미끼로 그녀에게 3개월,6개월,2개월씩 단발성 근로계약을 7차례에 걸쳐 연장했다. 현행 법상 계약직(비정규직) 신분으로 2년이 넘어가면 자동으로 정규직 전환이 되기 때문에 사측은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단발성 계약으로 몸을 사렸던 것이다. 그리고 정규직 전환을 사흘 앞둔 어느날,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내렸다.
해당 사건을 공론화한 심상정 의원 ⓒ 심상정 의원실
그로부터 한 달 후, 홀어머니와 힘겹게 살아가던 그녀는 늦은 밤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사측은 바로 성명서를 내지 않고 국회에서 심상정 의원이 이 사건을 공론화하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성명서를 홈페이지에 내놓았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사측 성명서 ⓒ 중소기업중앙회 홈페이지
권씨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죽음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공공연하게 갑(甲)의 위치에서 횡포를 부리는 기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기업은 면접에서 대놓고 '압박면접'이라는 명분하에 외모지적을 하거나, 학력이 딸린다거나, 부모님 직업, 그리고 서슴없이 정치적인 견해까지 묻곤한다. 면접자 입장에서 이 같은 질문들이 정말 입사에 도움되는 질문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면접관이 면접과 전혀 관련없는 엉뚱한 질문까지 해대니 늘 을(乙)일 수 밖에 없는 취업준비생은 면접스터디에서 해당 전공분야나 기본 면접준비 외에도 이런 질문에 대비해서 준비해야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권씨와 대학원을 함께 다닌 J씨(30)도 권씨가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둘은 지난해 여름부터 연세대 교육대학원 인적자원개발학과에 다녔다. 9월 25일, 자살하기 하루 전까지도 J씨와 권씨는 함께 대학원 수업을 듣기도 했다.
어느 취업 카페에서 08년도에 중기중앙회 인사담당자가 남긴 댓글.
J씨는 권씨가 대학원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노무사 준비까지 하고 있어 충분히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성추행 문제가 터지면서 문제를 제기하자 정규직 전환 약속을 거꾸로 협박에 이용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녀는 인턴신분으로 한달 급여는 고작 136만원이었다. 연봉으로 계산하면 1600만원에 불과하다. 낮은 연봉에도 그녀는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인고의 시간들을 버텨냈다. 동료들은 그녀가 정규직만큼이나 일을 잘 해낸다고 말했다. 그럼 사측에서는 좀 더 확실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애초에 정규직 시켜줄 맘이 없었다면 부려먹을만큼 부려먹고 2년 후에 정규직을 시켜줄 것이라는 사탕발림을 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소모재로 메꿀 수 있는 소모품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같은 입장에서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국회에서는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마음대로 소환할 수 없었다. 해당 기업은 약 4년 전 국감기관에서 해제됐기 때문이다. 소환에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회장은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참고인 자격으로 전무와 부회장이 출석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
그리고 권씨가 떠난 자리에는 중소기업중앙회 비상임이사 자녀가 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씨의 직장동료는 "이 문제는 단지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며 2년동안 피 말리면서 기다린 시간들, 사람들에 대한 배신, 버려졌다는 슬픔, 이뿐만 아니라 업무를 보면서 겪은 직장내의 수많은 성희롱, 쟤는 전환된다, 안된다의 직장 내에서의 소문들. 권씨가 겪은 2년이란 세월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끔찍하고 괴로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2014년 12월 10일, 어느새 중소기업중앙회 홈페이지에 걸려있던 성명서는 온데간데 없었다. 2달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나보다. 한때 시끄러웠던 이 사건 또한 많이 잠잠해졌고 우리들 기억 속에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이들 갑(甲)의 횡포를.
같이 읽으면 좋은 글 → 시사인 기사 - 정규직 꿈꾸었던 그녀의 죽음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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