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없는 날이면 기록했던 내용을 훝훝이 살펴본다. 그런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요일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오늘 하루만 보면 별 것 없지만, 하루와 이틀이 모여 사흘이 되고, 한 달, 일 년이 되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에 적었던 기록은 나를 더 깊게 들여다보는 가장 솔직한 자료가 된다. 나는 여행도 좋지만 일상도 좋아한다. 여행을 떠나서는 낯선 곳에서 유입되는 기록, 일상에서는 익숙한 곳에서 문득 떠오르는 기록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은 경험이다. 그리고 좋은 경험은 글이 된다. 모두 기록 덕분이다.
여행은 언제나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 마음 하나로는 항공권을 선뜻 구입하지 못한다. 구입하는 순간 여행 날짜가 잡히고, 준비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여행은 항공권 구입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항공권을 구입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평소에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는 많지만 한 줄로 정리된 명분이 없어 여행을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하다가 일상이 켜켜이 쌓이고 어느 날 문득 찾아본 여행 글에서 내가 떠나야 하는 명분이 되는 한 줄을 찾으면 이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심하게 요동친다.
20대 중반까지는 여행을 계획할 때 도전을 즐기기보다 실패를 줄이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장소는 확실한 성공이다. 여행을 다녀오면 어땠는지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그 순간만큼은 아직 그곳에 있는 듯 신나게 이야기한다. 말과 글로 표현되는 순간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녀온 순간을 떠올릴 때면 누구나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오사카에 다녀온 사람은 도톤보리에서 본 글리코상을 이야기하고, 파리 마르스 광장에 다녀온 사람은 에펠탑을 이야기한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말하고, 글로 쓴 대부분의 경험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보다. 애초에 태생이 검색을 통해 방문한 장소니 그럴 수밖에.
그런 여행은 실패하지 않은 여행이지만 훗날 그 여행을 떠올리면 고생했던 기억이 나를 먼저 찾는다.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무더운 여름에 다시 오지 않을 여행이라는 이유로 무리해서 걷고, 평소에 못 먹는 음식이라고 필요 이상으로 먹고, 꼭 가봐야 할 곳을 놓칠세라 주변을 둘러보기보다 목적지가 표시된 지도에 집중했다. 완벽하게 계획하지 않은 여행은 손해처럼 느껴졌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시간에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고 싶었다. 의미는 중요했다. 의미가 없다면 실패한 여행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의 여행이 좋은 경험으로 남았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실패하지 않은 여행을 다녀온 사실만 중요했다. 실패에 집중한 나머지 어떤 여행이 성공한 여행인지 몰랐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던 지난날의 여행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떠났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음식이 달랐다. 내가 하나 선택하면, 상대방도 하나를 선택하면서 일정을 조율했다. 조율을 통해 모두가 실패하지 않은 여행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 여행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로 홀로 떠난 여행에서는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계획 세우는 것이 만사 귀찮았다. 그래도 불안하니 세워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귀차니즘이 불안함을 이겼다. 떠나면서 계획하지 않은 이번 여행은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익숙하지 않았던 여행 첫날은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다음 날부터는 여행은 이래야 한다는 마음의 빚 따윈 없었다. 배고프면 그 순간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파는 가게에 갔고, 바다가 보고 싶을 땐 바다 근처에 내리는 버스를 아무거나 탔다. 많은 것을 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한국에 와서는 가장 생각나는 여행이 되었다. 예전처럼 고생했던 기억이 아니라, 정말 먹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과 가고 싶어서 바로 떠난 풍경이 나를 먼저 찾았다. 힘들 땐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쉬고, 체력이 다시 보충되면 그 순간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다. 그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닿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으로 충분했다.
일상은 평범하고, 여행은 특별하다. 그래서 스물 중반까지는 특별한 여행만 좇았다. 그 선택을 통해 특별한 것을 얻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곳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패턴이 숨어있다. 책이 읽히지 않는 날에는 서점에 가서 책 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극받고, 필사를 하고 싶은 날에는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써 내려가는 글자에 집중하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기록해놓는다. 이런 패턴을 고스란히 여행에도 적용하니 특별함이 사라지고, 평범함이 깃들었다. 그런데 평범한 여행이 되려 더 만족스러웠다. 여행을 떠나서 특별한 무언가를 찾기보다, 일상에서 행하는 좋아하는 것들을 여행에서 그대로만 해도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이 된다. 성공한 여행은 남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좋은 경험은 이렇게 곧 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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