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아간다는 것.
강신주의 다상담, 저자와의 대화 in 벙커원
지난 화요일, 혜화역을 다녀왔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살았어도 멀어야 종로 정도까지만 다녔는데 참 오랜만에 강신주의 다상담, 저자와의 대화를 듣기 위한 먼 발걸음이었다. 또각또각, 역에서 잠깐 친구를 기다리는데 이곳저곳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들어서는 정말 바쁘게 보였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는데 새로운, 아니 자주 가지 않던 곳인지 귀를 쫑긋하고 있었나 보다.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처음 가보기도 하고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미리 고민을 접수해 저자가 직접 해답을 제시해주는 형식으로 3시간 이상 진행됐다. 남 이야기이다 보니 집중이 잘 안될 줄 알았는데 사람 고민이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 보니. 아직도 생각나는 사연들이 3~4개 정도 있는데 언젠가 나도 반드시 경험해 볼 고민들이었다. 신기하게 남들 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들의 고민이 유독 많았다.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부자이지도 않은 적당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 나와서 취업도 쉽게 하고 결혼도 쉽게 했다는 어느 여성분, 결혼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내가 이 사람이랑 왜 결혼했지? "
정략결혼도 아니고 본인이 선택한 결혼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강신주 씨가 얘기했지만 그 생각이 그녀가 자신의 결정권에 대한 첫 의견이었을 거라고 한다.남들은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바로 인생 전반에 관한 결정권의 문제였다.대다수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즉 미성년자까지는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다가 어른이 되면서 그 결정권을 자기중심으로 갖고 오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 했다. (아마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그녀는 착한 딸일 것이다.) 라캉이 말했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욕망을 묵살한 채 부모와 주변인들의 기대에만 부응하고 살아온 것이다. 뭘 하고 싶어서 대학을 간 게 아니라 공부 잘하면 부모님이 좋아하니까 좋은 대학 가면 남들이 알아봐 주니까. 그리고 하고 싶은 일보다 그냥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맡는 게 받아 왔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도 하고 그게 편하니까 그렇게 쉴 새 없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편을 만나 어느 정도 여자로서 조급함도 들고 이 남자와 나쁘지도 않고 결혼해도 될 거 같아서 한 결혼이 1년 만에 후회로 돌아왔다.
지금 결혼 6년차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5년 동안 이혼에 대해 엄청 고민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아직도 이혼에 대한 남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결혼할 땐 친하지도 않았던 나서서 친구들까지 좋아해주었지만 이혼할 땐 그 누구도 반기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은 다 같이 좋아해주면서 하는 것이지만 이혼은 혼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어떤 일에 있어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속으로는 이미 이혼을 마음먹고 있지만 그러지 못한 상황에 굉장히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심지어 불행해 보이기까지 했다. 막차시간 때문에 끝까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돈 하나만 보고 행복을 담보 삼아 쉴 새 없이 달리는 사람들 많이 있다.
친구들은 현재의 행복까지 미래에 대한 투자로 미루는 그런 사람을 보고 성공할 거 같다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확률이 높다. 원치도 않은 과에 와서 흐지부지하게 4년 보내고 취업할 때 돼서 일단 하고 싶은 곳보다 돈 많이 주는 곳이면 억지로라도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나중에 좋아하는 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리고 조건에 맞는 사람과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 머리로는 늘 이상향을 지향하지만 결국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상황들은 자신의 신념과 직결되기 때문에 남의 조언이 도움 되질 않는다.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나 또한 대학교 4년 다니면서 현재의 행복을 담보 삼아 살아왔던 거 같다. 그리고 그게 편했다. 지금 행복하면 나중에 뭔가 불행할 거 같은 기분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신없는데 나만 이렇게 여유 있어도 되는 걸까?라는 압박감도 있었다. 빨리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 장만하고 평범한 가정에 아이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것.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오늘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꿈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신없이 흘러가다 보면 바로 옆 나무에 달려있는 행복이라는 열매보다 저 멀리 보이는 열매가 달콤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옆에 달린 열매를 먹으면서 숲 전체를 볼 줄 아는 시야도 필요하다.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 남들에게 뒤쳐진다는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자기 기준에서 잠시 쉬어가는 계기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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